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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주민이 세운 이장, 군수 앞에선 파리 목숨인가

김동욱의 하동 인사이트 혁신을 향한 목소리
  • 2026.03.24     제 44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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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의 하동 인사이트 혁신을 향한 목소리


주민이 세운 이장, 군수 앞에선 파리 목숨인가

판결도 없이 ‘마음만 먹으면 자를 수 있는’ 길을 연 하승철식 규칙 개정


기준이 사라진 자리, ‘사실’이라는 이름의 재량

지방자치는 주민을 섬기기 위해 존재한다. 그런데 그 제 도가 어느 순간 권력을 거스르는 사람을 정리하는 장치 로 바뀐다면, 그것은 더 이상 자치가 아니라 통제다. 지금 하동군의 이장 임명 규칙 개정안에서 많은 이장들이 불 안을 느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최근 하동군 이장 임명 규칙에 신설된 한 문장이 지역사 회에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공직선거법 또는 정치자금법을 위반한 사실이 있을 때.” 겉으로만 보면 그럴듯하다. 법을 어긴 사람을 걸러내겠 다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을 기 준으로 위반을 판단할 것인가’에 있다. 규정 어디에도 ‘유 죄 판결’, ‘확정 판결’, ‘벌금형 이상’과 같은 최소한의 법 적 기준이 없다. 대신 들어간 표현은 ‘위반한 사실’이다. 이 애매한 네 글자는 법률 용어의 탈을 쓰고 있지만, 실 제로는 행정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넓게 해석할 수 있는 위험한 문장이다.

대법원 판례가 말하는 이장의 법적 성격과 면직의 한계 사법부는 이미 이 문제에 대해 훨씬 더 본질적인 기준을 제시한 바 있다. 대법원 2010두18963 판결(2012.11.29. 선고)은 이장의 법적 지위와 면직의 성격을 명확히 짚 고 있다.

판례에 따르면, 이장은 공무원이 아니다. 지방공무원법 개정 이후 별정직 공무원에서 제외되었고, 현재까지도 공무원으로 규정된 바 없다. 또한 이장은 읍·면장이 마음대로 임명하는 존재가 아니라 주민의 의사를 반영해 위촉되는 자리이며, 면직 역시 주민 의견을 고려해야 하 는 구조다.

더 중요한 점은 면직의 법적 성격이다. 대법원은 이장 면 직을 행정청의 일방적 권력 행사인 ‘행정처분’이 아니라, 대등한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공법상 계약 해지’로 보았 다. 이는 곧 군수가 마음대로 자를 수 있는 대상이 아니 라는 뜻이다. 계약을 해지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합리적 사유와 명확한 기준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그런데 ‘위반한 사실’이라는 불명확한 기준이 들어오는 순간, 이 판례의 취지는 정면으로 흔들린다. 계약 관계에 서 요구되는 명확성과 합리성은 사라지고, 해석에 따라 면직 사유가 얼마든지 늘어날 수 있는 구조가 된다. 경고인지, 주의인지, 단순 조사인지, 아니면 실제 유죄 판결인지 구분도 없는 상태에서 ‘사실’이라는 이름만으 로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계약이 아 니라 사실상 일방적 해고와 다를 바 없다. 대법원이 분명 히 선을 그어 놓은 영역을 다시 행정 재량 속으로 끌어 들이는 셈이다.

결국 이번 규정 개정은 단순한 문구 문제가 아니다. 이장 을 주민 대표적 성격의 계약 관계로 본 사법부의 판단을 사실상 무력화하고, 다시 군수의 통제 아래 두려는 시도 로 읽힐 여지를 남긴다.

더 기가 막힌 것은 형평성이다. 일반 공무원조차 「공직 선거법」 위반으로 징계나 면직을 하려면 대체로 벌금 형 이상의 확정판결 등 분명한 법적 기준이 요구된다. 그 런데 공무원도 아닌 이장에게는 ‘위반한 사실’이라는 모호한 말 한마디만으로 면직 사유를 만든 것이다. 공무원 보다 더 약한 지위의 이장에게, 공무원보다 더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겠다는 발상이라면 그 자체로 이미 균형 을 잃었다.

이는 동 대법원 판례에서 확인한 이장의 법적 지위와 면 직의 성격에 정면으로 배치될 소지가 크다. 주민 대표적 성격을 지닌 이장을 공무원보다도 느슨한 사실 판단만으 로 해촉할 수 있게 한 것은, 명확성 원칙과 비례 원칙에 저촉될 여지가 매우 크다. 최소한 공무원에게 적용하는 정도의 기준과 절차도 마련하지 않은 채 이장만 더 세게 조이겠다는 것은, 법을 세운 것이 아니라 사람을 겨냥한 족쇄를 하나 더 채운 것처럼 비칠 수밖에 없다.

선거 국면에서의 적용, 오해를 부르는 구조

지금 하동군의 많은 이장들이 이 규정의 명확화를 요구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장은 마을 주민과 행정 을 잇는 가장 기초적인 연결고리다. 그런데 그 지위가 명 확한 기준도 없이 ‘사실’이라는 이름 아래 흔들릴 수 있 다면, 마을이 세운 이장이 군수 앞에서는 그야말로 파리 목숨이 되는 셈이다. 이것은 지역 자치의 숨통과 직결되 는 문제다.

더 우려되는 것은 시점이다. 선거를 앞둔 시기에 이런 조 항을 신설하고 기준마저 모호하다면 누구든 정치적 의 도를 의심하게 된다. 결국 마음에 들지 않는 이장을 언 제든 흔들 수 있는 구조로 읽히기에 충분하다. 법은 의심 을 지우기 위해 존재해야지, 의심을 키우기 위해 존재해 서는 안 된다.

행정은 법 위에 설 수 없고, 법의 이름으로 모호함을 확 대해서도 안 된다. 기준은 명확해야 하고, 적용은 일관되 어야 하며, 결과는 누구에게나 예측 가능해야 한다. 이것 이 법치의 최소한이다. 그 최소한조차 무너뜨린다면, 남 는 것은 규정이 아니라 눈치이고, 자치가 아니라 복종 이 된다.

지방자치의 품격은 화려한 구호가 아니라 이런 기본에서 드러난다. ‘위반한 사실’이라는 위험한 문장을 그대로 두 겠다는 것은 기준보다 재량을, 법보다 편의를 택하겠다 는 고백처럼 들린다. 하동군 행정이 정말 주민 위에 군림 하는 권력이 아니라 주민과 함께하는 행정이라면, 지금 이라도 이 독소조항부터 손보는 것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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