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소통과 불통 그리고 오통(誤通)… 소통, 그리 어려운 과제인가 ?
김형동 주간하동 감사
- 제 3 호
본문
소통이 전 세계적인 화두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서방세계가 소통 부족으로 전쟁을 벌이고 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야당은 윤석열 대통령이 소통이 되지 않는다며 연일 맹렬한 공격을 퍼붓고 있다.
이러다 보니 입법권의 다수를 확보한 민주당이 잇따른 법령 제정으로 맞불을 놓고 있다. 탄핵도 이어지고 있다. 의사단체나 의사, 전공의들도 정부와 소통이 되지 않는다며 거의 파업 상황을 이끌었다.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원만한 소통이 없었다고 설명할 수 있다. 이래저래 국민만 피해를 보고 있다.
제대로 된 정책의 부재로 인한 피해를 비롯해 의료서비스 불편 등 총체적 난국이다. 이런 상황에 놓인 국민은 국가와 해당 이익 단체들을 향해 제발 소통해서 빨리 꼬인 상황을 풀어달라고 외치고 있다.
이런 의미와 유사하게 의사단체에 대응해서 보건과 간호사 단체에서 항의성 시위를 펼치기도 했다.
이런상황을 놓고 하동군민들도 아우성이다. 큰 정치든 작은 정치든 제발 정치를 똑바로 하라고 고함지르고 있다. 윤석열 정부를 향한 불만도 만만찮다. 이른바 위로 향한 불만의 폭발이다.
이뿐만 아니다. 하동군 내 소통 단절 또는 불통에 대한 불만도 커지고 있다. 하승철 군수를 포함한 하동 군정과 군의회가 맞선 모양새를 보였다.
소통 부재로 인한 상황이다. 일부 풀렸지만, 과정은 대단히 꼴불견이었다. 하반기 의회도 출발부터 순탄하지 못하다.
후반기 의장단 구성에서 이미 불협화음이 드러났다. 본격 운영에 들어갔으니 제발 소통이 원활하게 이뤄지기를 기대하고 있다.
소통 단절과 불통보다 더 무서운 상황이 있다. ‘오통(誤通)’이다. 소통은 하고 있지만 일부 사람들과 소통에 그치는 경우다. 아니면 소통한 내용과 다르게 이해하는 경우다.
본인은 정작 열심히 소통하고 있다고 항변하지만, 사실 불통보다 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다. 이른바 여론 전달 과정의 왜곡이 더 심각해지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이런 사태를 놓고 독재라는 오명이 붙여졌다. 필자가 보기에는 지금 하동군도 이와 거의 유사한 모습이다.
하승철군수를 비롯한 하동군청 공무원들은 무언지 모르겠지만 열심히 소통하고 있다고 한다. 겉으로 보기엔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노력을 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하지만 일부만을 대상으로 소통이 이뤄지고, 군민의 대표자인 군의원들 간에도 제대로 소통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면 이것을 진정한 의미의 소통이라고 볼 수 있을까? 이런 경우를 두고 ‘잘못된 소통 즉, 오통’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하동군의회 내의 소통도 거의 유사한 모습으로 읽어진다.
소통, 쉽지만 쉽지 않은 인간의 행동이다. 인간은 동물들 가운데 유일하게 소통을 위해 언어나 말을 만들었다. 서로 가장 잘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그 동네 말이다. 남들이 볼 때는 사투리 또는 방언이라고 폄훼할 수도 있다.
하동 사람들은 남들이 뭐라고 하든 ‘하동 말’로 소통하면 된다. 이것이 진정한 지방자치다. 하동군의 좋은 자치 모습일 거다. 그렇다면 하동군수와 공무원, 군민들 간에 하동 말 이외에 다른 말을 사용하고 있는 건 아닌지 궁금하다.
얼마 전 총선을 통해 하동을 대표할 국회의원도 뽑았다. 좋은 의원나리 뽑았다고 환호했던 때가 불과 엊그제다.
하동군민들만이 뽑은 건 아니지만 하동군민들의 뜻이 상당수 반영됐다. 하지만 이번에는 또 나라 살림을 위해 뽑은 국회의원과도 소통이 쉽지않다고들 아우성이 터져 나오고 있다.
아마도 서천호 의원은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고 의아해할 것이다.
하지만 현장의 반응은 분명 ‘갈데 마음하고 나올 데 마음하고 다르다’고 느끼고 있다.
아직 임기 초인 데다 초선으로서 눈코 뜰 새 없는 일정을 보내다 보니 이런 반응도 충분히 감수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된다.
소통, 그것이 그리도 어려운 것인가? 라는 질문에 답해야 할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대통령이 그렇고, 국회의원이 그렇고, 군수가 그렇고, 군의회 의장이 그렇다.
국민을 달래고 군민을 달래기가 쉽지 않은 과제임은 잘 안다. 하지만 하동군민들은 마음이 넓다. 높은 지리산과 넓은 섬진강을 끼고 있는 덕분이다.
나아가 너른 들판도 밟고 있으니 여느 고을의 사람들보다 이해심도 인내심이 크다. 기다릴 줄을 안다는 의미다. 그런데도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반응이 솟구쳐 나온다면 어찌해야 할까? 방법을 바꾸어 보는 것도 좋은 방안이라고 생각한다.
만나는 사람을 바꾸고 횟수를 조정하고, 만나는 방식과 시간을 달리해 보는 것도 좋은 방안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필요하다면 머리스타일도 바꾸어 보고 옷감과 옷 색깔도 바꾸어 입어보는 것도 고려해 볼 만한 대목이다. 응어리진 군민들의 가슴을 뻥 뚫어줄 사람은 불과 서너 사람의 지도자들이다.
필자도 소통 문제에 있어서 자유롭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시 묻는다. 소통, 그게 그렇게도 어려운 일인가? 노력은 해 보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