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 음양 이야기 (3) | 음양의 분화와 오행 생성
| 이동진 기고 |
- 제 16 호
본문
無極
↙ ↘
陰 中 陽
↙ ↘ ↙ ↘
음 양 ↓ 음 양
水 金 中 木 火
● ◕ ◓ ◔ ◯
태음 소양 ↓ 소음 태양......四象體質
水 金 土 木 火
無極에서 陰陽으로, 陰陽에서 五行(木火土金水)으로 분화 가 되었다.
지금 부터는 五行이 언제 부터 사용 되었는지 알아보자 중국 은나라 때 복희씨가 거북의 등 껍질에서 이상한 모양 을 보고 河圖(하도)를 만들었다고 한다.
나중에 이것이 명리학의 生의 原理로 발전된다.
이후 주나라때 문왕이 홍수를 방비 하고자 연구하다 洛書 (낙서)를 만들었다.
이후 주역 경서를 만들게 하였고 이 주역 경서를 노나라때 공자가 깊이있게 연구를 하였다.
나중에 이 주역 경서는 제갈량이 신출귀몰하게 사용하였 던 八卦 圖 陣法(팔괘도진법)의 기초가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洛書는 명리학에서 克의 原理로 발전된다.
五行이 사용된 근간을 알기 위해서는 한나라 역사를 알아 야 이해가 쉽다.
<다음의 이야기는 불교저널을 참고한 글 입니다> BC 206년 項羽(항우)를 이긴 劉邦(유방)이 漢高祖로 즉위 한다.
漢 高祖(한고조) 劉邦은 오랜 전란으로 피폐해진 백성들 의 삶에 관여하지않고 간섭을 최소화 하는데 초점을 맞춰 자유로운 생활을 하도록하였다.
황실도 검소하게 생활 하였고 세금도 거의 걷지 안했다. 그 결과 나라는 풍요로워 졌다.
사마천의 “史記“에도 곡식을 쌓을 창고가 가득차서 길가 에 쌓아 둘 정도 였다고 한다.
이어진 文帝(문제) 景帝(경제) 때도 皇老學(황노학)에 기 초하여 자유방임에 가까울 정도로 백성들의 자유분방함 을 인정 하였다.
황노학은 皇帝學(황제학)과 老子學(노자학)을 근간으로 한다.
•老子學은 無爲自然主義(무위자연주의)를 기본으로 한다
•皇帝學은 황제내경으로 素問(소문) 81편과 靈樞(영추) 81편으로 구성되었다.
素問 81편은 의학이론으로 예방 진단 치료 등을 문답 형식 으로 만들어진 의학사상 부문이다.
靈樞 81편은 經絡(경락)과 針灸(침구...침과 뜸)를 다룬 부 문이다.
자유방임이 너무 지나치자 사회가 문란하여 지고 위계질 서가 없어지자 儒學자 陸賈(육가)가 고조에게...
”인간의 욕망은 절제 되어야 하고 남녀의 결합도 정해진 법도에 따라야 한다“ 라고 주장하며 高祖 에게 건의한다. 高祖는 그에게 국가의 흥망성쇠와 그 원인을 파악해 올리 라고 명령한다.
이에 陸賈(육가)는 “禮義(예의)가 행해지지 않아서 남녀가 멋대로 만나고 人倫(인륜)이 무너져서 도의가 피폐 해졌 다.
이에 聖君(성군)께서 五經(오경)을 정하여 六藝(육예)를 밝히시고, 天地運行(천지운행)의 원리를 따르시고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여 이에 맞는 근본을 세워 人倫(인륜)을 펴 시어야 한다” 라고 상소를 올린다.
이것이 “新語”(신어) 이다.
•天地運行... 여기에서 陰陽의 이치가 정치에 스며들게 된다
•五經(오경)...詩經 · 書經 · 禮記 · 周易 · 春秋
•六藝(육예)...藝 · 樂 · 射 · 御 · 書 · 數
•人倫(인륜)... 공자(BC551년~479년)의 인륜사상으로 평 등을 근간으로 五倫을 주장하였다.
五倫(오륜)... 君臣有義(군신유의) 父子有親(부자유친) 夫婦有別(부부유별) 長幼有序(장유유서)
朋友有信(붕우유신)
하지만 高祖는 新語를 접수만 하고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高祖가 죽고 文帝 때에 賈誼(가의)가 仁義에 기초한 도덕 정치를 주장 하였으나 용납되지 않았다.
내적인 역량이 응축 되어야만 실행에 옮겨 질수가 있는 것인데 黃老學 신봉자들의 세력이 儒敎를 주장하는 세 력 보다 컸기 때문에 사회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았 기 때문이다.
그후 黃老學에서 儒敎學으로 사회적인 분위기가 비뀌는 것은 景帝의 11번째 아들 劉徹(유철)이 武帝로 등장 하면 서 변하기 시작한다.
武帝는 황태자 시절 儒學에 심취하였다. 儒學은 禮樂을 중시한다.
禮는 매너와 규범이고 樂은 품격이다.
中庸에서 말하기를 “선비는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묻고 깊이 思索(사색)하며 밝게 판단한다” 고 하였다.
이런 선비상은 오랜 학습과 훈련으로 교양과 지식이 몸에 배어야 가능 한 것이다.
•선비는 학식이 있고 인품을 가진 사람을 뜻하는 순 우리 말이다.
한자로는 士(선비사)로 쓴다.
士 -> 一 + 十 으로 풀이하면 하나의 도리로 전체를 꿰뚫 는다는 뜻인 “吾道一以貫之”로 통한다.
하나는 전체로 통한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속담과 일맥상통한다.
十 + 一 로 풀이하면 다양한것들을 하나로 통일시킨다는 뜻인 “博文約禮”로 요약된다.
전체는 하나로 통한다.
문학과 예술이 형식미를 갖추고 사회적인 규범으로 나타 나는 것이 禮樂이다.
이러한 品格은 돈이 많다고 하여 얻을수 있는게 아니다. 武帝는 16세에 즉위를 하여 세상을 바꾸고자 賢良方正(현 량방정) 을 시도하여 재야에 숨어있는 선비를 천거를 통 해 등용하였다.
賢良方正을 시도하여 趙綰(조관) 王藏(왕장) 등을 등용하 였지만 黃老學 신봉자인 할머니 竇太后(두태후)의 힘에 밀려 趙綰 王藏은 제거된다.
竇太后가 죽자 武帝는 다시 賢良方正을 실시하여 董仲舒( 동중서) 라는 천하의 인재를 만나게 된다.
武帝가 董仲舒에게 천하를 안정시킬 계책을 묻자 대답하 기를 “罷黜百家獨尊儒術”(파출백가독존유술)을 주장 하 였다.
“파출백가독존유술”은 지금 사람들이 괴상 한 것이나 드 러내고 외도를 고 있으니 이제 儒家의 六藝로 모든 것을 다스리고 이외의 학설은 금지 하라는 것이다.
이를 무제가 수용하여 儒敎를 국교화 한다.
董仲舒는 “春秋”박사였다.
春秋의 첫 머리에 나오는 “春王正月”(춘왕정월)이라는 뜻 을 이렇게 설명한다.
臣이 春秋를 살펴 王道가 어떻게 시작 되는지를 보니 “ 바름(正)은 王의 다음에 있고 王은 봄(春)의 다음에 있습 니다.
봄(春)은 하늘이 정하는 것이요 한해의 시작을 제정하는 것은 王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뜻은 王은 위로 하늘이 행하는 것을 받들고 아 래로는 자신이 행하는 바를 바르게 하여 王道의 시작을 바 르게 하는 것 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말은 하늘의 뜻을 받들어 아래로 향하는 유일한 존재는 王이라는 의미이다.
이제 세상은 王을 중심으로 統一 되는 것이다.
하늘아래 사람중에서 유일하게 존엄한자 王에 대한 복종은 곧 하늘의 뜻을 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王 1인에 의해 모든 것이 통일된다는 “大一統“ 사 상이다.
이러한 大一統 체제는 임금은 신하위에 있고(君爲臣綱) 아버지는 자식위에 있고(父爲子綱) 남편은 부인위에 있다 (夫爲婦綱) 는 三綱(삼강)을 만들어 낸다.
孔子의 五倫이 상호평등 관계에서 기초한 것임에 반해 三 綱은 수직적 차별구조를 정당화 하기에 이른다.
董仲舒는 이를위해 抑陰尊陽(억음존양) 할 것을 주장한다. 이렇게 董仲舒가 제창하고 漢 武帝가 확립한 大一統 체제 는 성별 · 직업별 · 신분에 따른 차별을 정당화는 논리로 발전한다.
또한 董仲舒는 한나라는 中華라 하고 주변국가들을 東夷( 동이) · 西戎(서융) · 南蠻(남만) · 北狄(북적) 이라 하여 東 西南北과 中央(土)을 의미하는 五行思想을 세상에 펼치게 되는 시발점이 된다.
이렇게 陰陽 五行思想은 한나라에서 정치와 사회에 접목 시키면서命理學 연구가 시작 되는 것이다.
이러한 命理學이 明나라때 가장 활발하여 明理學이라 하 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漢字도 東夷族이 만들어 사용한 것인데 東夷 族을 접수한 漢나라가 한자를 만들었다고 주장한 사람이 기도 하다.
東夷族은 중국 황하 양자강 유역의 하류와 한반도 서안을 중심으로 번성 되었으므로 자연히 서해를 오가는 해상교 통도 발달 되었고 孔子는 聖人의 나라라 하여 사람이 죽 지 않는 나라로 알고 배를 타고 서해를 건너기도 하였다 는 기록이 있다.
武帝는 젊은시절에 一統體制를 세우고 西域征伐(서역정 벌)로 실크로드를 개척하였다.
또 중국 東岸(동안)의 東夷族과 南蠻 北狄 徐戎을 굴복시 켜 중화나라의 자존심을 세우며 漢나라를 가장 번성한 국 가로 만들었다
하지만 말년의 武帝는 神仙術(신선술)에 빠져 불로장생을 위해서 재물을 아끼지 않았다.
궁궐을 神仙들이 사는 곳처럼 꾸미고 천하의 方士(방사) 들을 불러 들였다. 늙기싫고 죽기싫어 몸부림 치는 모습은 진시황과 닮은 꼴 이었다.
武帝가 말년에 젊은 여인 趙첩妤(조첩여)를 후궁으로 삼 아 아들 昭帝를 생산 하였다
•趙첩妤(조첩여)...趙씨 성으로 첩妤(첩여)의 품계를 가진 궁녀 漢武帝는 昭帝를 황태자로 앉히고 외척의 발호를 염 려하여 趙씨에게 죄를 씌워 자결하게 하였다.
禮樂을 존중하던 젊은 황제의 모습은 사라지고 권력질서 를 정당화하는 지배이념으로 변절된 마음은 아마도 수양 부족이 원인이라고 생각된다.
참고문헌 불교저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