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중도’라는 무지와 비겁이 초래하는 파멸

김동욱의 하동 인사이트 혁신을 향한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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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라는 무지와 비겁이 초래하는 파멸

좌파의 프로파간다에 매몰된 지적 태만과 무관심, 비열한 자들의 지배를 자초하는 ‘회색인’




‘중도’라는 이름의 기만적 프로파간다와 좌 파의 함정


영국의 철의 여인(The Iron Lady) 마거릿 대처는 생전에 “길 한가운데 서 있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양쪽에서 오는 차에 치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라고 경고했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망령처럼 떠도는 ‘중도’라는 개 념이 바로 이와 같다.

중도는 흔히 합리적이고 균형 잡힌 시각으 로 포장되지만, 실상은 좌파 세력이 자신들 의 급진성과 비논리성을 감추기 위해 쳐놓 은 고도의 정치적 그물이다. 저들은 자신들 의 사악한 의도를 ‘진보’라는 이름으로 세탁 하고, 이에 동조하지 않는 이들을 극우(極 右)로 몰아세우며, 그 사이의 공간을 ‘중도’ 라는 신성한 지대로 설정했다. 대중으로 하 여금 옳고 그름의 명확한 판단을 유보하게 함으로써 정치적 판단력을 마비시키고, 결 국 자신들의 비열한 통치를 용인하게 만드 는 ‘우민화 프로파간다’의 정점이 바로 중도 를 예찬하는 것이다. 중도라는 안개 속에 갇 힌 국민은 적과 아군을 구별하지 못하며, 결 국 저들이 파놓은 파멸의 함정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가게 된다.


지적 게으름이 낳은 괴물: 신문 사설을 읽 지 않는 세대의 비극


현대 보수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영국의 사상가 에드먼드 버크는 “악이 승리하기 위 해 필요한 유일한 조건은 선한 사람들이 아 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 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행동의 부재 뿐만 아니라 ‘생각의 부재’를 의미한다. 현 대의 이른바 중도층은 이념에 대한 무지(無 智), 사상에 대한 무지를 ‘중립’으로 착각하 고 있다. 그 원인은 지독한 독서의 결여와 지적 태만에 있다.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다수결의 원칙에 기반하며, 현대의 대의민주주의는 국민이 선출한 지도자를 통해 국가의 명운을 결정 하는 제도다. 

그러나 이 제도가 성공하기 위한 대전제는 국민 다수가 정치와 사회에 대해 올바른 식 견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국민의 수준이 낮은 나라에서 민주주의는 결코 성 공할 수 없으며, 오히려 중우정치(衆愚政 治)라는 괴물을 낳을 뿐이다. 민주주의 국 가의 국민이라면 반드시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분별할 수 있는 혜안을 지녀야 한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나는 정치에는 관심이 없다”는 말을 마치 자신의 결백함을 증명 하는 훈장이나 자랑처럼 떠들곤 한다. 하지 만 이는 실상 좌파의 우민화 프로파간다에 완전히 포섭된, 무지하고 부끄러운 고백일 뿐이다. 정치를 외면하는 것은 민주주의 국 가의 주권자로서 최소한의 소양도, 자격도 없음을 스스로 실토하는 행위와 다름없다. 과거 우리 하동의 어르신들은 비록 정규 교 육의 기회는 적었을지언정, 손에서 신문을 놓지 않았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정수 를 담아 쓴 사설을 읽으며 세상을 보는 눈을 길렀고, 무엇이 국가와 지역을 위한 길인지 토론하곤 했다. 잉크 냄새 밴 신문을 펼치던 그 시절의 하동은 비록 가난했으나 지적 기 백만큼은 당당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젊은 세대는 고학력을 자랑하면서도 신문 사설 한 줄 읽기를 거부한다. 단지 인터넷 공간에 서 자극적으로 가공된 뉴스 제목과 선동적 인 문구, 짧은 영상들에 휘둘리며 그것이 세 상의 전부인 양 착각한다. 깊이 있는 사유와 검토 없이 ‘좋아요’와 ‘공유’로 점철된 여론 의 홍수 속에서, 이들은 좌파의 선동에 가장 취약한 먹잇감이 되어 ‘중도’라는 도피처로 숨어들고 있다. 책장을 넘기는 수고를 잊은 이들에게 정치적 혜안이 깃들 리 만무하다.


도덕적 용기가 거세된 비겁한 낙원


단테 알리기에리는 《신곡》에서 “지옥의 가장 뜨거운 곳은 도덕적 위기의 시대에 중립을 지킨 자들을 위해 예약되어 있다”고 일갈했다. 중도는 가치 중립(中立)이 아니라 가치 부재(不在)다. 정의와 불의가 충돌할 때 중간에 서겠다는 것은 결국 불의의 손을 들어주는 것과 다름없다. 회색인은 갈등의 현장에서 뒷짐을 진 채, 어느 한쪽이 승기를 잡을 때까지 비겁하게 숨을 죽인다.

중도를 자처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갈등을 지양하는 평화주의자라고 자위하지만, 실상은 공동체의 운명이 걸린 중차대한 결정 앞에서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겠다는 비겁한 태도일 뿐이다. 이들은 승자가 누구인지 확실해질 때까지 관망하다가, 결과가 나오면 슬그머니 승자의 편에 서서 무임승차한다. 이러한 비겁함이 만연한 사회에서 원칙과 소신은 조롱거리가 되고, 기회주의와 처세술이 미덕으로 둔갑한다. 우리 하동의 미래가 걸린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이들은 ‘정치적 무관심’, ‘중도’라는 가면 뒤에 숨어 공동체를 서서히 안락사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진실을 말해야 할 때 침묵하는 것은 중립이 아니라 악에 대한 동조이며, 그 대가는 공동체 전체의 도덕적 파산으로 돌 아온다.


전시 행정과 선심성 예산의 늪: 방관이 부 른 폭주


플라톤의 경고는 오늘날 더욱 뼈아프게 다 가온다. “정치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는 것에 대한 벌 중 하나는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우리가 중도를 표방 하며 정치로부터 눈을 돌릴 때, 그 빈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파탄 난 인물들 이다. 대한민국 중앙 정치 무대에서 온갖 전 과와 비열한 의혹을 주렁주렁 달고도 뻔뻔 하게 고개를 드는 이들이나, 잡범 수준의 얕은 수로 법망을 농락하며 민심을 호도하는 세력이 득세하는 이유는 바로 '중도'라는 방관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관심의 대가는 지역 사회에서도 혹독하게 나타난다. 국가적 정의에는 눈을 감고 '중립'을 자처하는 이들이 늘어날 때, 지자체의 수장은 미래 먹거리 창출이라는 본연의 책무 대신 당장의 환심을 사기 위한 전시 행정에 혈세를 쏟아붓게 된다. 길가에 끊임없이 심어대는 가로수와 꽃들, 정작 실효성 없이 향후 막대한 유지 관리비만 축낼 공공 건물들을 짓는 데 매몰된 행태는 하동의 100년 대계를 갉아먹는 행위다. 위에 서는 법치를 조롱하는 전과자들이, 아래에서는 치적 쌓기에 급급한 행정가들이 활개 치는 형국이다. 우리가 '중도'라는 이름으로 이러한 비정상을 묵인할 때, 지자체의 곳간 은 비어가고 미래 세대는 감당할 수 없는 빚 더미를 물려받게 된다. 꽃은 지고 가로수는 자라지만, 그 아래에서 군민의 삶은 피폐해 져 간다. 비열한 지도자는 무관심한 시민이 낳은 사생아다.


지식의 복원과 책임 있는 선택만이 하동을 살린다


이제 ‘중도’라는 허울 좋은 환상에서 깨어나 야 한다. 진정한 중심(中心)은 양극단의 중 간이 아니라, 확고한 지적 토대 위에서 내리 는 서슬 퍼런 선택에 있다. 책을 읽고, 신문 을 탐독하며, 선동의 문구 뒤에 숨은 진의를 파악하는 지적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과 거 우리 어르신들이 시간이 나면 신문 사설 을 읽으며 보여주었던 그 매서운 통찰력을 회복해야 한다. 지식은 권력을 감시하는 가 장 날카로운 칼이며, 사유(思惟)는 선동을 막아내는 가장 튼튼한 방패다.

하동의 미래는 나부끼는 플래카드와 스마 트폰 액정 속의 선동적인 제목이 아니라, 치 열한 독서와 사유를 통해 얻은 확신에 찬 투 표지 한 장에서 결정된다. 중앙의 부도덕한 정치꾼들과 지역의 위선적인 통치자들에게 군민의 엄중한 심판을 보여주어야 한다. 무 엇이 정의인지, 누가 참된 일꾼인지 가려내 는 용기만이 하동을 다시금 기백 넘치는 고 장으로 바로 세울 수 있다. 선택하지 않는 자에게 미래는 없다. 굴종의 평화보다 소신 있는 갈등이 낫다. 오직 책임 있게 선택하는 주권자만이 파멸의 늪에서 하동과 대한민 국을 건져낼 수 있을 것이다.

하동 군민 여러분, 이제 회색의 가면을 벗 어야 할 때다!